<앰뷸런스> 블루레이를 보려고 꺼내다가 포기하고 디즈니 플러스를 켜서 <토르: 라그나로크>를 감상했다. 현타가 왔기 때문이다. 기껏 블루레이를 구매했는데, 넷플릭스에 <앰뷸런스>의 4K HDR 버전이 업데이트되어 있었다. 그러니까 그냥 HDR도 아니고 돌비비전까지 지원하는, 마치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도 된 것처럼 완벽한 버전이었다. 4K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없는 나로선 현시점에서 <앰뷸런스>를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넷플릭스에 올라온 <앰뷸런스>를 감상하는 것이다. 이게 속이 터진다.
실은 이런 일은 이전에도 발생했었다. 베놈 시리즈 블루레이를 구매해서 보려는 찰나,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에 <베놈 2: 렛 데어 비 카니지>의 4K HDR 버전이 업데이트되었다. 그뿐인가? <스파이더맨: 파 프롬 홈> 역시 넷플릭스에 4K HDR로 서비스되었었고, 그로부터 1년이 지나자 이번엔 디즈니 플러스가 <스파이더맨: 파 프롬 홈>의 4K HDR을 서비스한다. 그나마 다행인 건 넷플릭스가 스파이더맨의 최신작인 <스파이더맨: 노 웨이 홈>은 4K HDR로 서비스하지 않고 있다는 것. 그러나 1년 뒤, 넷플릭스의 서비스가 끝난 뒤 바통을 이어받을 디즈니 플러스까지 <스파이더맨: 노 웨이 홈>과 같은 킬링 타이틀을 HD로만 서비스할 것 같진 않다. 분명히 4K HDR로, 어쩌면 아이맥스까지 포함해서 서비스할지도 모른다.
그러니까 디즈니, 폭스, 워너 브라더스, 파라마운트뿐 아니라 OTT 서비스를 하고 있지 않은 할리우드 스튜디오들도 이제 OTT 쪽에 자사의 영화를 넘길 때 4K HDR이 포함된 소스를 넘긴다는 얘기가 되겠다. 아니면 OTT 업체가 직접 HDR 그레이딩을 해버리거나. (이건 오버 아니냐는 얘기를 할 수 있지만, 이미 한국 드라마인 <빈센조>가 뒤늦게 HDR로 그레이딩 되어 서비스되고 있다.) 이는 4K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당장 구매할 돈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거의 재난처럼 느껴질 것이다. 4K HDR로 OTT를 감상할 환경이 되는 내가 이렇게 느끼는 마당이니 아예 OTT를 4K로 감상할 환경 자체도 안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.
이와 같은 난감한 일이 반복되면 될수록 사람들의 블루레이에 대한 애정이 사라져갈 거다. 블루레이 시장 축소는 이제 세계적 현상이 될 것이고, 스튜디오들은 블루레이를 매니아들만의 전유물로 남기거나 디즈니처럼 시장 철수를 통해 OTT 시대에 대한 의지를 피력할 거라 본다. 안 그래도 메이킹 영상이나 코멘터리까지 OTT에 들어가는 시대다. 점점 블루레이만의 강점이 사라지고 있다. 물론, 4K 블루레이와 OTT의 4K를 1:1 비교하면 4K 블루레이의 화질이 압도적으로 더 좋지만, 갈수록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고 공간적 한계가 노출되는 물리 매체에 희망을 느끼지 않는 한 4K 블루레이가 OTT와 맞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. 장담한다. 이제 블루레이 유저들 중에서도 4K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사느니 애플 TV 4K를 두 개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더 많을 것이다. 안방에 하나, 거실에 하나.
시대는 물리 매체의 종말을 고하고 있다. 나와 같은 블루레이 유저들은 그 종언을 피부로 흡수하는 중이다. '체감'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맞아 떨어질 정도로 끝남을 이해하고 있다. 영화 <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>에서 행성 파괴를 눈앞에서 목도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기억나시나 모르겠다. 지금 블루레이 유저들이 블루레이 시장을 바라보는 느낌이 바로 그렇다. 블루레이 유저가 등장인물이고, 데스 스타가 OTT다. 피할 수 없는,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멍하니 쳐다본다.
몹시 슬프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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